(소설) 샐러리맨 – 제7장 (1)

제7장 LBA바이오 (1) 

가면 쓴 사람의 입에서 조호이산이라는 말이 흘러나오자 노인의 안색이 급격히 굳어졌다. 서정을 누군가로부터 떨어뜨려 놓으려는 계책을 쓴다는 것은 결국 목표는 그 누군가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가면 쓴 사람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이만 본가로 돌아가죠. 요즘 많이 지치는 것 같거든요. 좀 쉬고 싶네요.”

노인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그렇게 알고 지시를 내리겠네.”

노인이 급히 자리를 떴다. 자리를 뜨는 노인을 바라보는 가면 쓴 사람의 눈에 촉촉한 이슬이 맺혔다.

(할아범, 고마워요. 이 은혜는 반드시 갚을게요. 다만 복수가 끝난 후에야 가능할 것 같아요.)

이렇게 한 사람이 소리 소문도 없이 비명횡사하고, 가면 쓴 사람과 노인이 야산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 시각, 한불케미칼은 큰 혼란에 휩싸였다. 

과거 1997년 10월부터 시작된 외환위기로 나라가 휘청거리고 무수한 대기업이 부도로 쓰러질 때에도 한불그룹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한불그룹의 한 축을 담당했던 한불케미칼이 M&A 광풍 속에서 이건종합화학의 지분을 인수함에 따라 그 반대급부로 한불케미칼이 전력투구하여 국내 시판 승인까지 받았던 ‘다비트러'(엔브렐 바이오시밀러)를 포함한 바이오의약품 사업을 10 년만에 접고 말았다. 

한불케미칼 연구소장 임상호 박사가 한불케미칼 사장에게 읍소했다. 

“이게 뭡니까? 하루 아침에 바이오의약품 사업을 접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더군다가 그 이유가 이건바이오 때문이라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 아닙니까?”

기실, 연구소장이 이렇게 읍소하는 것은 사장으로부터 원하는 것을 확보하기 위한 전제 작업이었다. 

“바이오시밀러 분야를 내어주더라도 신약 분야마저 포기하다니! 그럴 수는 없습니다.”

사장이 가만히 듣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연구소장도 잘 알지 않소.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이오. 이미 위에서 결정해서 내려왔는데 어쩌란 말이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려 10 년입니다. 그 동안 땀 흘리며 고생한 연구원들을 무슨 낯으로 본단 말입니까? 한순간에 길거리로 내쫓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그게 나도 가장 마음이 아프다네. 하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 아니오? 다시 담을 수도 없고… 내 입장도 정말 난감할 따름이오.”

한불케미칼 사장도 몹시 골치 아프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때는 이때다 싶은 연구소장이 슬쩍 운(韻)을 뗐다. 

“그 많은 연구원들을 이대로 모른 척 하실 겁니까?”

사장이 여전히 두 눈을 감은 채 풀 죽은 목소리로 건성건성 말했다.

“내가 모른 척한다고? 그런 말하지 말게. 나도 다 생각하고 있다네.”

연구소장이 더욱 강한 눈빛과 함께 힘주어 말했다. 

“뭘 생각하시는 데요?”

사장이 천천히 두 눈을 뜨며 연구소장에게 말했다.

“그 동안 등록했던 특허를 말소시킬 뿐만 아니라 연구개발로 얻은 기술에 대해서도 과감하게 포기하기로 말일세.”

연구소장이 놀란 듯 말을 더듬었다.

“그, 그건… 바이오의약품 사업을 포기하는 대신에 연구원들에게 창업의 기회를 주겠다는 겁니까?”

사장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바로 그런 의미라네. 내가 눈치채지 못했다면 상관없겠지만, 그러나 말일세. 자네 눈치를 보아 하니 자네도 그걸 원하는 것 같은데. 아닌가?”

연구소장이 미소를 지었다. 

“눈치채셨습니까?”

사장이 연구소장을 보면서 함께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서툰 연기로 누굴 속이겠다고… 자네 뜻을 모르는 바 아니니까 원하는 대로 해 보게. 하지만 사업이란 게 생각만큼 쉽지 않을 걸세. 자넨 그 방면으로는 서툴 테니까 믿을 만한 사람이 있다면 많은 도움이 되겠지. 어쨌든 내가 말린다고 내 말을 들을 사람도 아니잖나. 그러니 어쩌겠나? 여기까지가 자네와의 인연이라면 더 붙잡을 수도 없겠지. 내가 자네와 연구원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이게 전부라네. 사실 더 줄 게 없어서 그게 참 마음 아프네.”  
  
며칠 후, 한불케미칼에서 퇴사한 연구소장과 연구원들 17명으로 구성된 ‘LBA바이오’라는 바이오벤처가 설립되었다.

*****

며칠 간 편안한 마음에 허리가 아프도록 잠을 실컷 잔 서정은 비몽사몽 중에 가늘게 눈을 치켜 뜨고 기지개를 켰다. 

“아으!” 

두툼한 목을 양옆으로 까닥거리며 스트레칭을 하는 서정의 몸에서 환추(Atlas)와 축추(Axis)가 엇나가는 듯한 ‘우두둑’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어제 아들 녀석과 식혼도(食魂徒; Soul Eater) 게임을 오래 했나? 거의 꼬박 날을 새다시피 했으니까 내가 생각해도 이건 좀 오바야.” 

서정은 침대에서 일어나 침대 모서리를 잡고 허리 스트레칭까지 마저 끝냈다. 하지만 서정은 뭔지 몰라도 마음이 영 개운치 않았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좋은 일에는 대개 나쁜 일이 따라오게 마련이라는데…”

서정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순간,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반사적으로 휴대폰을 집어든 서정은 이내 쓴웃음을 흘렸다. 

휴대폰 액정 화면에 뜬 것은 한불 연구소장이었다. 벨이 3 번쯤 울렸을 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서정입니다.”

“한불 연구소장입니다. 기억하시죠?”

“물론 기억하다마다요. 그런데 왜 그러시죠?”

“며칠 전에 한불케미칼에서 독립해서 LBA바이오라는 바이오벤처를 설립했는데, 왠 괴인들이 들이닥쳐서 인간 알파-시누클레인(synuclein) 항체 관련 자료를 달라고 생떼를 부리고 있습니다. 좀 도와 주시겠습니까?”

서정은 즉시 전화를 끊고 얼굴을 대충 씻더니 휴대폰에 찍힌 역삼동 테헤란로를 향해서 급히 차를 몰았다.

그 시각, LBA바이오 사무실에 난입한 괴인들이 자료를 찾는다고 온통 헤집어 놓고 있었다.

“그런 자료는 없다니까요. 몇 번씩 말해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어떤 연구원이 괴인들에게 제법 담대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 없었다.

“이 새끼들이… 거짓말하지 말라니깐 그러네. 알파-시누클레인 자료, 빨리 내놔. 안 그럼 너희들 오늘 최소한 팔다리 하나 부러진다.”

괴인들이 자료를 찾지 못하자 여기저기서 고래고래 고함질을 하며 길길이 날뛰었다. 

LBA바이오 사무실 출입구엔 영상 인식 센서가 설치되어 있는데, 어떻게 그곳을 통과했는지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LBA바이오 사장 임상호 박사는 당황한 나머지 미처 그것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 몇몇 연구원들이 반항했다가 발길질을 당하고 쓰러진 이후에는 반항하는 연구원은 단 하나도 없었다. 반항해봐야 상황을 반전시킬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괴인들의 공세는 더욱 거셌다. 그들은 연구원들을 짐짝 취급하면서 으름장을 놓았다. 

“자료 내놔. 안 내놓으면 정말 크게 다친다.”

괴인들이 아무리 연구원들을 닥달해도 말하는 사람이 없자 괴인들의 우두머리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여기 사장 임상호가 누구냐? 빨리 나와.”

하지만  임 박사는 그곳에 없었다. 비로소 임 박사가 사무실에 없다는 걸 확인한 괴인들은 당황했다. 

기실 괴인들이 원하는 자료는 비밀금고에 들어 있었지만, 그걸 아는 사람은 임 박사뿐이다. 다행이 임 박사는 지금 사무실 밖에서 상황을 살피는 중이었다. 

괴인들은 더 이상 연구원들을 괴롭히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들은 뭔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잠시 후, 가면 쓴 사람과 노인이 나타났다. 두 사람이 여기저기 살펴보더니 기어이 비밀금고를 찾아냈다. 

“이것이로군요.”

가면 쓴 사람의 말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하시려고?”

노인의 질문에 가면 쓴 사람이 한쪽 눈을 깜빡거리며 윙크를 보냈다.

“금고털이, 이리 와서 이거 열어.”

“넵.”

한 괴인이 잽싸게 다가왔다. 그는 가방에서 스프레이를 꺼내더니 금고에 달린 키보드에 칙칙 뿌렸다. 1 분쯤 지나자 스카치테이프로 키보드에 갖다 대고 살살 문지르더니 조심스럽게 떼어 냈다. 그러자 숫자마다 지문이 많은 묻거나 아예 묻지 않은 게 식별할 수 있게 되었다. 

괴인이 이번에는 괴상하게 생긴 장치를 꺼내더니 숫자 몇 개를 입력한 후에, 키보드에 연결하더니 뭔가를 만지작거렸다. 과거의 금고털이 전문가라면 섬세한 청각과 촉각으로 금고를 쉽게 열겠지만, 지금은 디지털 금고이기 때문에 그런 케케묵은 수법은 통하지 않는다. 

0부터 9까지 10개로 구성된 비밀번호를 무작정 조합하는 것보다는 많이 사용하는 숫자 중심으로 조합하는 게 확률상 맞을 가능성이 높다. 괴인이 금고털이 전문가로 불리는 이유가 있었다. 

삑삑 소리가 몇 번 나더니 도저히 열릴 것 같지 않던 디지털 비밀금고가 열렸다. 

“금고를 열었습니다.”

괴인이 가면 쓴 사람에게 인사하고 장비를 주섬주섬 챙기더니 뒤로 물러났다. 그제서야 가면 쓴 사람이 금고 안의 서류를 살펴보더니 서류뭉치 하나를 품에 넣었다. 

“원하는 걸 찾았으니 이제 떠나자.”

결국 LBA바이오가 한불케미칼을 떠날 때에 가지고 나왔던 중요 자료가 가면 쓴 사람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연구원들은 괴인들이 떠날 때까지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언제 그들이 이런 일을 경험해 봤겠는가. 그 충격은 한동안 계속되었고, 괴인들은 그 틈에 썰물처럼 LBA바이오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심하게 다친 연구원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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