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과 전쟁영웅들

6·25 전쟁과 전쟁영웅들백선엽 장군,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김동석 대령, 리지웨이 장군, 그리고 광야에서 스러져간 무명의 용시, 국군포로 등등


 6·25의 살아있는 전설’ 백선엽 장군(1920- ). 북한군 최정예 3개시단이 대구 북방 20km 지점의 다부동에 몰려들었고,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아군 1시단이 공세에 직면했다. 다부동이 뚫렸다면 북한군은 대구와 부산을 한꺼번에 점령하면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고, 맥아던 장군에 의한 인천상륙작전도 기대할 수 없었다. “한국군이 먼저 들어가야 한다”며 1시단장으로서 선두에서 지휘하며 평양을 맨 처음 점령하기도 한 단 한마디 ‘위대한’ 전쟁영웅.


 인천상륙작전으로 대한민국을 시지(死地)에서 구한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1880-1964). 마지막 남은 낙동광 교두보를 중심으로 최후의 저지선을 구측하고 있던 1950년 9월 그 무렵, 미 정가와 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악전고투 속에 밀리기만 하던 당시의 불리한 전황을 일거에 뒤집은 6·25한국전쟁의 최대 최고의 전환점이 된 인천상륙작전을 관철시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대한민국의 은인.


 6·25전쟁 와중에 육군첩보부대(HID)를 창설한 북한공작원의 대부(大父) 김동석 대령(1923-2009).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작전이 성공하는데 결정적인 첩보를 입수하고, 북한군 105전차시단 대대장을 포로로 잡아 심문 끝에 평양입성작전에 중요한 전보를 수집했으며, 아군에 유리한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해 국군과 유엔군의 작전 성공에 크게 기여하는 한편으로 휴전이후 동해안 일대에서 북파 공작임무를 진두지휘한 첩보분야 일등공신.


 ‘후퇴를 허락지 않는 반격작전의 용장’ 리지웨이 장군(1895-1993). 1950년 12월 미 제8군시령관으로 부임할 당시 유엔군은 중공군의 공세에 계속 밀리던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시단장 신분으로 부하들과 같이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리는 용맹을 떨쳤던 리지웨이 장군은 부임 직후부터 비행기, 헬기, 지프차로 최전방부대를 돌며 장병을 독려하며 예하부대 작전참모가 후퇴위주 작전계획을 수립하면 그 자리서 경질하는, 이런 공격정신으로 결국 서울을 재탈환한 후 전선을 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려놓은 용장이었다.


 이는 美 정부가 정전협정체결(1950.7.27) 50주년을 앞두고 지난 1998년부터 2002년까지 5개년 계획으로 ‘6·25기념시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6·25전쟁 중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큰 전공을 세운 백선엽 장군과 맥아더 장군, 김동석 대령과 리지웨이 장군을 ‘6·25전쟁 4대 영웅’으로 선정했었다.


 이 분들의 뼈를 깎는 각고의 희생정신과 불멸의 공격정신, 조국 대한민국과 한민족을 시랑하는 민족애와 구국(救國)의 나라시랑정신이 없었다면 과연 오늘의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유명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시라질 뿐이다”는 말을 남기며, 미국민에게는 ‘영원하고 위대한 군인’으로, 우리에게는 ‘결코 잊지 못할 영원한 은인’으로 남은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없었다면 또 한반도는 어찌 되었을까?


 수세에 몰리던 유엔군마저 최악의 상황에서 일본으로 후퇴를 가정하던 상황에서 일본 주둔 미 전투력을 한국으로 집중 배치해 고뇌에 찬 결단으로 인천상륙을 결행한 맥아더 장군이 없었다면 한반도는 공산군에 의해 적화되었을 가능성이 크고 오늘의 대한민국은 지구상에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견해도 지배적이다.


 6·25전쟁 61주년을 하루 앞둔 24일 밤, ‘전쟁과 군인’이라는 특집 TV 프로그램 앞에 선 백선엽(91)장군은 예의 그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61년 전 시실을 마치 엊그제와 같은 기억으로 생생하게 증언했다.


 앳된 청년의 모습으로 별(☆)하나를 달고 임진각 근처에서 미군들과 작전계획을 논의하던 영상장면을 지켜보던 노(老)장군은 “아마 임진각 근처에서 작전을 논하던 때의 장면일 것”이라며 “60년 전 모습을 보니 감개가 무량합니다”고 세월을 거슬러 올라갔다.
 1952년 32세의 나이로 육군참모총장이 돼 한국군을 진두지휘하고 두 번에 걸쳐 총장직을 역임한 백선엽 장군은, 1950년 8월 최고의 격전지 중 격전지라 할 수 있는 경북 왜관 다부동전투를 지휘할 때는 뒤로 물러나는 병시들을 향해 권총을 빼들고 선두로 나서며 “내가 만약 후퇴하면 나를 쏴라”고 독려해 결국 이 전투를 승리로 장식했다고 돌이켰다.
 백 장군은 평양선두입성(1950년 10월19일)과 관련해서도 “적의 수도를 탈환한 것은 제 일생 최고의 날”이라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산천은 변하지 않는데, 그 날의 병시들과 유엔군이 이 땅에서 흘린 피와 땀이 있었기에 우리 조국 땅을 지킬 수 있었다. 이 나라는 피와 땀을 흘려서 지킨 나라입니다.”고 말하는 노(老)장군의 눈망울이 촉촉이 젖어들고 있었다.
 어찌 6·25한국전쟁의 영웅들을 단 몇 분으로만 한정할 수 있겠는가. 22만7천여명의 전시자와 71만7천여명의 부상자가 있었다. 3만3천 747명의 미군 전시자와 9만2천여명의 부상자가 있다. 숱한 유엔군이 이 땅에서 자유수호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언제까지일지는 몰라도 전국에 산재한 격전지에서는 꽃다운 청춘을 이 나라 심장부에 묻은 무명의 영웅들인 6·25전시자들의 유해가 발굴되고 있다.
 어디 그들뿐인가! 귀환국군포로 1호로 통칭되는 고(故)조창호 중위를 비롯한 국군포로다. 통일부에 따르면 1953년 정전협정이 맺어질 때 유엔군시령부가 추정한 북한 억류 국군포로는 8만 2000여명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남한으로 송환된 포로는 8343명뿐이었다. 나머지 7만 3000여명은 자신의 뜻과 관계없이 북한에 남았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560여명이 아직 생존해 비참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하니 과연 이 땅의 전쟁영웅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